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문단 편집) === 6.25 전쟁 발발 당시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전쟁 발발 3일 후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하루 전인 6월 27일 이미 전선은 서울 창동 근처까지 내려왔고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내려갔다.[* 처음엔 대구까지 내려갔으나 이승만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다시 올라오던 중 대전역에서 다른 각료들의 만류로 내려서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 일단 피난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게, 국난 상황에서 정부의 피난 자체는 흔한 일이었다.[* 정부요인들이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서 포로로 잡혔다면 이후 국정은 미증유의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누가 직위를 승계하느냐부터 시작해서 그 혼란을 틈타 [[어부지리|북한만 웃었을 것이다.]]] 실제로 1, 2차 세계대전에서도 참전국들 중 정부가 위기에 처한 수도를 버리고 후퇴한 사례가 많으며 프랑스나 폴란드는 물론 네덜란드나 노르웨이 등등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가는 거진 다 그랬다. 이승만은 더 많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한 군사작전 중 일환이었으며 이승만이 지켜야 할 국민은 서울 인구 150만명뿐만 아니라 남한 국민 2,150만명도 있었다. 거기에 마침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참전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켜 혼란을 막겠다는 생각 + 자신의 대전행을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연막 효과 등을 위해 대전에서 중앙 방송국을 통해 특별 방송을 실시했다. 이른바 6·27 특별방송이다. 일주일 후 7월 4일 이승만 특별방송에서 자신이 서울을 내려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내 한 몸이 국군의 앞에 서서 죽음으로서 싸워야 옳을 것인데 피하여 나온 것은 구차히 목숨을 위해서 한 것이 결코 아니오 첫째는 성중에 있으면 군경(軍警)전투상에 도리어 곤란을 당하겠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요. 또는 내가 나와 앉아서 세계에 호소해서 공론이 일어나야 할 것을 각오한 것이 두번째의 이유인 것입니다. >---- > 전쟁 경과에 대해 대 국민 특별방송(이승만 대통령, 1950. 7. 4.) - 한국사DB 당시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 여사]]나 경무대 비서 등의 회고록에 의하면 대통령은 갈 마음이 없었고 신성모가 전날 밤까지 반격에 성공했다고 허풍을 쳤다. 북한군이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걸 우려한 신성모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대리는 적이 청량리에 왔다는 [[가짜 뉴스]]를 알려서 이승만을 떠나게 했다. 창문이 깨지고 스프링이 튀어나온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에서 간신히 마련한 3등열차 2칸을 이은 특별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갔다가 이승만은 상황이 보고와 다름을 알고 다시 서울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대전역에서 신 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이 더 이상의 북상은 위험하다고 만류하고 미군 참전과 결의안 통과, 정부부처들의 후퇴를 보고받고 충남도지사 공관에서 임시수도를 재건하게 된다. 그래서 충남도지사 공관을 대전 경무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개방되어 있어 관람이 가능하다. 그런데 [[http://panzerbear.blogspot.kr/2010/06/1950-6-27.html|당시 미국 대사]]가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미 25일 밤 이승만은 정부가 공산당에게 잡히면 대한민국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되어 안되기 때문에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려 한다고 말했으며 [[http://panzerbear.blogspot.kr/2011/04/blog-post_17.html|정작 외국인인 대사는 수도에 남아 국군의 사수를 돕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음은 무초 대사가 보낸 문서의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 전 [[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실제로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김홍일]],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김석원]], [[이종찬]]으로 구성된 군사원로자문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신성모는 군경력이 없고, 채병덕은 병참이 주특기였다. 이들 두 명에 유동열과 이종찬이 결전을 주장했는데, 유동열은 광복군출신 중 가장 연장자로 '''무려 1903년에 기병병과로 일본육사를 졸업'''[* 구한말시기 군인들 중 엘리트들을 뽑아서 일본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하였다.]한 인물이며, 이종찬은 해당 회의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였다. 이들 8명 외에 참여할 만한 인물이던 일본군 출신 중 가장 연장자인 [[이응준]] 준장은 5사단장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25일 뒤늦게야 전쟁발발에 경악한 채병덕이 오전 7시에야 전군에 비상을 걸고나서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는데, 이유는 '''영국에서 오래 사셔서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기'''때문이다. 이에 채병덕이 직접 상황보고를 하고 나서인 10시 30분에야 이승만한테 가서 보고를 했으나, 이때도 '''크게 걱정하실 것 없다'''라는 소리만 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오전에 각료들과 26일 오후 9시 김태선 치안국장 및 27일 새벽 2시 신성모, 조병옥, 이기붕의 피난건의'''를 모두 거절하다가,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허위보고'''에 떠났다.] >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번역: 길 잃은 어린 양의 놀이터( http://panzerbear.blogspot.kr/2010/06/1950-6-27.html?m=1)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26일 채병덕과 함께 국회에 출석한 신성모는 '''"국군이 걱정없이 물리친다. 해주를 접수하고 3~5일이면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라며 거짓 보고를 했으며, 27일 새벽 1시에 비상국회를 연 신익희 의장은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황을 물어보았을 때에는 신성모는 수도 이전을, 채병덕은 수도 사수를 주장하면서 결국 '''수도사수결의가 채택'''되었으나,[* 그러나 정작 군사원로자문회의에서는 ''의정부 방면 역습''이냐, ''한강선 방어''냐를 두고 반으로 갈라졌으나 신성모와 채병덕이 현실 파악 하지 못하는 축차투입으로 후방의 병력만 갈아버리고 말았다.] 이후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번역: 길 잃은 어린 양의 놀이터 ( http://panzerbear.blogspot.kr/2011/04/blog-post_17.html?m=1)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에 1950년 6월 26일(한국 시간 6월 27일) 당시 기록이 있다. [[파일:TrialandHope.png]] >월요일이 되자 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들은 어둡고 실망스러웠다. 이승만은 美 국무부의 電文 보고 형식으로 쓴 편지를 통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6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북한공산군은 남한에 대한 무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각하와 미국 의회도 잘 알다시피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태를 예상, 동양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군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李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 대사는 낙담하여 거의 울먹였다. 나는 전투가 겨우 48시간 지났을 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서 종국적 승리를 거두어 자유를 지켜냈다고 말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나는 그에게 버티어내라면서 지원이 진행중이라고 했다. >------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Trial and Hope)'(1946~1952)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